Hahn's Anthology

책을 출판할 작정이라면…

by Hahn on Jul.08, 2010, under In Korean(한국어), Thoughts

작년 <88만원 세대> 우석훈 박사의 아뜰리에에 참여하면서 적은 노트의 내용이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책을 출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와 처음으로 책을 내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실질적이며 기술적인 조언들이 있어 정리해 보았다.

  1. 두괄식으로 이야기하라.
  2. 기회가 주어질 때에는 무조건 핵심부터 이야기하라.
  3. 한국 출판시장에서
  4. 옴니버스는 절대 팔리지 않는다.
  5. 연작을 할 작정이라면, 독자의 흥미를 끌만한 것은 모두 다 첫 권에 넣으라.
  6. 88만원은 컨셉이다. 메타포다. 조어감각을 가지라.
  7. 모든 시장에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다. 2010 월드컵 특수, 7, 8월의 휴가철 시장, 3월의 예비대학생 시장 등등.
  8. 20대는 20대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9. “유혹에 관한 전략” – 무언가 매력적인 것을 끼워 넣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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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s TEDxSeoul is all about?

by Hahn on Jul.07, 2010, under Being TEDxSeoul Organizer, In Korean(한국어)

안녕하세요?

TEDxSeoul 오거나이저 류한석입니다. 아래 발표문은 지난 Salon 행사에서 제가 발표한 바 있는 TED와 TEDxSeoul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내용입니다.

<TED>

TED는 테크놀로지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의 약자로 1984년에 시작된 컨퍼런스입니다. 청중을 졸게하지 않으면서도 핵심을 전달할 수 있는 마술과도 같은 마지노선 18분 포맷으로 유명하죠. 빌게 이츠, 알랭드보통, 필립스탁, 이사벨아옌데, 고든 브라운, 제인 구달 등등 보시다시피 이름만 들어도 손발이 떨리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무대에 선 바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지금껏 공개된 600여 개의 강연 중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채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생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의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바뀌어간다는 것은 참 놀랍고 신기한 경험이죠.

<All Knowledge is Connected>

TED가 시작된 것은 1984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TED라는 이름처럼 테크놀로지 엔터테인먼트 디자인에 한정된 내용을 주로 다루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제는 점차 넓어져 수많은 분야를 넘나드는 컨퍼런스가 됐습니다. 2000년을 전후하여 크리스 앤더슨이 TED를 인수할 당시 눈여겨 본 부분도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IT, 비즈니스, 심리학, 종교, 생물학, 디자인, 인문학, 음악, 미술, 체육 등 모든 분야가 각기 제 자리에서 급격하게 발전하는 가운데 이런 발전의 내용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모 든 지식은 연결되어 있다(All knowledge is connected.)”임을 깨닫게 된 것이죠. 후에 TED를 전뇌 스파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ideas worth SPREADING>

크리스 앤더슨은 컨퍼런스 안에서만 멤돌던 내용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야 하겠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슬로건이 바로 “ideas worth spreading”이죠. 이 ideas worth spreading이라는 비전은 크게 지금까지 두 가지로 실현됐습니다. 첫째, 모든 동영상을 전세계에 무료로 공개한 것. 둘째, TEDx를 세계 각국의 지역사회에서 자발적인 아이디어 공유의 장을 일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프 로듀서 준 코헨의 말대로 “A philosophy of radical openness”가 구체적인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동영상을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 2006년. 열린 번역 프로젝트를 론치한 것이 작년 4월. TEDx 프로그램을 론치한 것이 작년 5월 인데, 채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이루어 낸 결과는 정말 어마어마 합니다.

  • 685 talks viewed
  • 250,000,000 times
  • 4000volunteer translators
  • 77 languages
  • 9,000 translations

<TEDxSeoul So far>

TEDxSeoul이 이런 세계의 TEDx 행렬에 본격적으로 동참하게 된 것 역시 작년 11월 27일이었습니다. 6월에 있었던 첫만남을 계기로 17명이 모여 inspire, share, change를 모임의 모토로 정하고, “홍익인간”을 주제로 처음 열었습니다. 이벤트에서는 황두진, 이 자람, 김창원, 송치복, 빌드레셀하우스, 이은결, 제너럴닥터, 등 10분의 연사를 모시고 열렀습니다. 황두진 선생님은 어떻게 동네에서부터 세계화를 이루어 나갈 것인지를 이야기 해 주셨고, 이은 결은 마술을 통해 깨우친 삶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제네럴 닥터는 의료란 것이 어떻게 인간이 한 인간을 위해 일한다는 것인지를, 김창원님은 2000년 이래 갈라파고스가 되어버린 한국 IT의 현실과 희망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행사 경험 한번 없는 사람들, 그야말로 전혀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이벤트는 미미하지만 생각보다 큰 반향을 몰고 왔습니다.

17명의 멤버가 모여 만든 첫 행사는 TEDxSeoul이 저희로 하여금 사람들의 마음속에 모종의 변화와 자극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뜻 깊은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벤트가 대단히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340명이라는 숫자는 참여하는 개개인들이 서로를 알아가고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자리가 되기에는 너무 컸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기획했던 것이 지난 3월에 열린TEDxSeoul Salon입니다. TEDxSeoul Salon은 350여명 규모였던 첫 행사가 사람들의 교류를 만들어내기엔 조금 컸던 점에 착안해 처음으로 사람들이 서로 편하게 이야기하며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는 일종의 실험이었죠. 80여명이 모여 ‘음식의 마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백석의 시에 담긴 음식에 대해 이야기 해주신 소래섭 선생님, 지진으로 어려움을 겪은 아이티 구호현장에서 먹거리가 가지는 의미를 이야기 해 주신, 김재학 선생님, 한국의 싸이월드 및 블로그문화가 어떻게 한국 음식산업 을 움직였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 제니퍼, 막걸리 탈레반 장기철 선생님 등등이 무대에 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맛난 음식과 막걸리를 사이로 한 만남과 대화의 자리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Inspire, Share, Change>

이렇게 두번의 이벤트를 거치며 저희가 새롭게 깨닫게 된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고 아이디어가 퍼지면서 실제로 세상에 TED와 TEDxSeoul이 다리를 놓아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첫 이벤트에서 새로운 한글 키보드를 제시했던 홍동원 선생님의 아이디어는 실제로 카이스트의 한 학생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섭외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제닥의 김승범, 정혜진 제닥은 서울대학병원과 인연이 닿아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표정인식 기술을 연구하는 올라웍스의 CEO 유 중희님은 TEDxSeoul에서 만남 다른 여성분과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요 며칠전에는 TED의 사라가 방한하여 좀 더 좋은 이벤트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TEDxNASA에 서 발표한 데니스 홍의 강연을 번역한 김준한씨는 개인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기도 했구요. 그 리고 지금 이 자리에 이르기까지 TEDxSeoul은 5천명 의 트위터 팔로워(다른 TEDx 행사들과 비교), 5백명의 페이스북 회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TEDxSeoul은 “만남”이구나. Inspire, Share, Change라 는 애초의 키워드가 “만남”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구나. 가치 있는 메시지가 적절한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 메시지는 변화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리고 뜻이 있는 사람이 뜻을 기다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만남은 변화를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TEDxSeoul은 메시지와 사람이, 또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통로임을 새로이 자각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영국 수상이 된 데이빗 카메론의 강연을 한국 정치인들이 본다면? 켄 로빈슨의 창의력과 교육에 대한 강연을 전국의 선생님들이 본다면? 엘리자벳 길버트의 두려움과 창의력에 대한 강연을 전국의 예술가들이 본다면? 의료란 인간이 인간에게 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제너럴닥터의 메시지가 TED.com을 타고 전세계 청중들에게 전달된다면? 이 모든 아이디어를 지하철과 출퇴근 버스에서 접하게 된다면?

지난 2월 TED2010에 참여하면서 참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이 땅에서 아동 비만을 없애겠다”고 제이미 올리버가 이야기하자 즉석에서 청중들이 손을 들며,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을 돕겠다고 이야기 하더군요. 참 으로 놀랍고도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제이미 올리버가 TED에 서 그랬듯, TEDxSeoul이 뜻을 가진 사람이 뜻을 기다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된다면?

TEDxSeoul은 만남을 위한 곳입니다. 온라인에서 메시지가 사람들을 만나고, 오프 라인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곳. 그래서 영감과 열정이 공유되고 이것이 모든 가능한 변화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대중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을 대중으로 보는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 레이몬드 윌리암스

아마 가시적인 변화들은 바로 눈에 띄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변화는 버스 안에서, 지하철 안에서, 고등학교 교실에서, 대학 강의실에서 지금 이순간에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중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저 자신을 비롯한 구체적인 개인의 마음 속에서 말입니다.

<“변화를 기다리는가? 직접 그 변화가 되어라.”

– 마하트마 간디

10년 전만 해도 이런 일들은 불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핸드폰도, 대 용량 비디오 전송을 허용하는 인터넷도, 소식을 쉽고 빠르게 전할 수 있는 트위터도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기술과 정보의 변화가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해준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의 꼭대기에 TED와 TEDxSeoul이 있습니다.

앞서 보신 세스고딘의 동영상처럼, 변화가 오고 있음을 아는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 더 큰 변화를 이끄는 곳. 변화를 TEDxSeoul은 그런 곳입니다. 7월 말에 열릴 두번째 TEDxSeoul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내년에는 북경과 도쿄와 합작하여 TEDxAsia로 마른산에 불처럼 번져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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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verse and Shrek: Forever After

by Hahn on Jul.05, 2010, under Thoughts

Today I watched Shrek: Forever After with Joanna in Seoul. One day Shrek felt sick and tired of ever-repeating same-old-days and he signs on a magical contract to live a parallel world where nothing made him to live his life as of now happened. In the new reality he entered, everything seemed just fine on the first glance but later he realizes that he lost all the things he loved; His beloved three babies, best friend Donkey and his Fiona. The curse made upon him with the contract can be canceled only with a kiss of true love.

I kind of liked the setting that he enters a different reality where canceling of just a small thing had led everything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what it used to be in this world because that it somewhat reminded me of a concept like “many world theory” or “multiverse“. They’re ideas found in the field of quantum mechanics but pretty much the same notion is noticed in the field of linguistics as well, particularly in semantics.

According to Wikipedia, in quamtum physics it goes like;

The multiverse (or meta-universe, metaverse) is the hypothetical set of multiple possible universes (including our universe) that together comprise everything that physically exists: the entirety of space and time, all forms of matter, energy and momentum, and the physical laws and constants that govern them. The term was coined in 1895 by the American philosopher and psychologist William James.[1] The various universes within the multiverse are sometimes called parallel universes.

- Wikipedia

In linguistics, David Lewis once wrote in metaphysical manner;

It is uncontroversially true that things might have been otherwise than they are. I believe, and so do you, that things could have been different in countless ways. But what does this mean? Ordinary language permits the paraphrase: there are many ways things could have been besides the way they actually are. On the face of it, this sentence is an existential quantification. It says that there exist many entities of a certain description, to wit, “ways things could have been.” I believe permissible paraphrases of what I believe; taking the paraphrase at its face value, I therefore believe in the existence of entities which might be called “ways things could have been.” I prefer to call them “possible worlds.”

- David Lewis, Counterfactuals, 1973,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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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기사들

by Hahn on Jun.18, 2010, under Uncategorized

http://dilbert.com/blog/entry/the_value_of_ideas/

아이디어는 쓸 데 없다. 실천이 전부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타이타닉 영화를 실제로 찍기 전까지는 그냥 로맨스 영화의 하나일 뿐이었다. 실제로 결과물이 나왔을 때 그 결과물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결과물이 없을 때 추상적인 concept만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것이 천양지차로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크게 공감이 가는 이야기.

http://www.watermarkonline.com/index.php/lgbt-blogs/scottiesavestheworld/4315-How-Lost-TEDxOrlando-Virginity.html

다섯명으로 시작한 TEDxOrlando의 참관기다. 엘리자벳 길버트가 이야기 했던 바, “자신의 소명, calling을 따라 가는데 두려움이 길을 막도록 허락하지 말라”는 메시지에 받은 공감에 이어, TED의 ideas worth spreading이라는 mantra가 어떻게 TEDx로 구체화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추천하고 있는 TEDtalks 들이 여럿 있었는데, 내가 보지 못한 것도 많아 후에 반드시 체크해 보아야 하겠다고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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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의 깨달음

by Hahn on Feb.09, 2010, under In Korean(한국어)

언젠가 금강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서 삼상(三上)이라는 봤다가 그 내용이 하도 웃겨서 기억해 뒀다. 생각이 잘 떠오르는 세 가지 장소가 바로 말 위(馬上), 침대 위(寢上), 변소 위(厠上)라는 거다. 나 역시 오늘 공강 시간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문득 두 가지씩이나 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나. 그 깨달음이란 첫 째, 이 삼상의 법칙 일찍이 발견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 둘 째,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경험은 그 다른 어느 시대보다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 사실을 공강시간 UCSD 캠퍼스의 어느 공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깨달았다.

미 국 화장실에는 한국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들자면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접이식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다는 점과, 소변기의 높낮이가 다 다르다는 점, 그리고 좌변기 칸마다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가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하려는 얘기는 이중 마지막의 시트커버 디스펜서와 관련한다.

나는 이 칸마다 배치된 1회용 시트커버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왜?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요도 없는 게 왜 이렇게나 가시는 화장실마다 많이도 있을까? 그건 아마 난 아니라도 이 사람들에겐 필요한 거니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고 저도 사람이다. 한 사람은 필요 없고 한 사람은 필요한 게 도대체 뭘까?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왜 필요한 걸까?

germ, 즉 세균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보다 훨씬 징글징글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TV를 두 시간만 보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TV 광고의 삼분의 이는 넘어 보이는 약 선전, 비누 선전 속의 레퍼토리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 “현미경을 들이대니 어라, 세균이 많네! 그렇게 살지 말고 우리 약 먹어봐! 자 이제 깨끗하지?”다. 그래서 미국인은 제약 회사 혹은 비누회사의 광고를 통해 새로이 세균에 대한 공포를 주입받는다. “세균을 죽여 없애자!”라는 brainwash를 당한다. 나와 면접을 하던 다이애나 아줌마가 기침을 살짝 해놓고는 굳이 “germ”을 튀겨 미안하다는 해괴한 사과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땅의 유치원생들이 초록색의 못생긴 세균을 그리고 그 밑에 “Germs are in the air, on your hands, on your feet, and they can get on the foods we eat!”라는 문구를 적은 포스터를 만들고 칭찬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인은 확실히 한국인보다 세균이 무섭다. 미국인의 머리 속에 그려진 화장실의 중요한 한 부분이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인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미국인은 세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악의 축이 두려운 것이다.

세균은 공기에도 있고 손에도 있고 발에도 있어요. 먹는 음식에도 있어요.

여 기에는 미디어 사회의 놀라운 매커니즘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 자신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시트를 타고 세균이 스멀스멀 내 엉덩이를 타고 오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무서운 체험이지만,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나는 시트커버를 깔지 않고 좌변기에 앉아있는 내가 문득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놓았다. 언젠가 네이버 뉴스에서 ‘좌변기에 의외로 세균이 없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기사를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깜짝 놀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나조차도 판단을 네이버 1면에 유보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세균이 두려운 것도, 세균이 두렵지 않은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 이버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연구결과”가 우리의 눈을 현혹한다. 이게 좋다더라, 이게 나쁘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저게 나쁘다더라. 그러면 우리는 ‘이게 나쁘구나.. 저게 좋구나.. 이게 나쁘다잖냐, 저게 좋다잖냐’ 한다. ‘권위있는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하잖냐’ 한다. 같은 유전자 콩을 놓고 한쪽에서는 위험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안전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전자 콩은 절대 안 먹는데 반하여, 또한 편 어떤 사람은 별 걱정 없이 잘만 먹는다. 이러나 저러나 ‘박사님의 말씀’이 머리에 들어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해 주신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E-편한세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역사가 지향해온 바가 유토피아니까. 하지만 이렇게 점점 편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을 느끼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판단을 네이버에, 조선일보에, 또 시트콤 논스톱에 아웃소싱하는 경향 역시 점점 커지고 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겪지도 않은 일을 경험했노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 경험이 매체의 경험에 의해 잠식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 1994년 무렵이었던가. TV는 60년대 정도인 것으로 안다. 신문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였을 거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와, 신문을 보며 이명박을 욕하고, TV에서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싸이를 뒤지며 남 삶을 옅볼 수 있는 세계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활자매체의 전파에 힘입어 소위 미디어라는 것이 대중화 된 이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던 것을 의식한다. 네오와 미스터 앤더슨의 이중생활처럼 우리가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 한쪽의 세계에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족과 오랜 친구가 있고, 매일같이 학교와 집을 이어주는 버스가 있으며, 서너 군데쯤의 자주 들르는 단골집이 있다. 그 반대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박지성이 국위를 선양하고,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오바마와 힐러리가 접전을 벌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시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명박을 만나고 있는 세계다. 일상이라는 물리적인 세계와 매체라는 붕 떠있는 간접의 세계가 서로 하나가 됐다가 둘로 분열이 됐다가 서로 확대 재생산 됐다가, 서로 완전히 관계 없는 것으로 되었다가 한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살지 않는 세계인지가 모호해진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생각인지가 모호해진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경험되는 중요해 “보이는” 것들에 의해 가리워진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라디오도 없던 1800년대를 살았던 사람의 삶은 지금보다 편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훨씬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 때의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여러 다양한 경계가 복잡하게 중첩되고 혼선되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세상이 힘들게 돌아가도 곰실슈퍼 아저씨와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하지 않았던가.

소고기, 부시, 이명박 대운하와 삼성 특검에 이르기까지 점점 미쳐 돌아가는 것으로만 보이는 네이버 속의 한국을 보면 경악하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다가 한편으로 이게 아냐, 내가 겪은 게 아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한다. 아귀다툼장인 것처럼만 보여서,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한국도 사실은, ‘구체적으로 겪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 오기 전의 삶을 떠올려 봐도 내가 실제로 겪는 구체적인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접하는 세계와 중첩되는 부분보다 그렇지 않는 부분이 더 컸으니 말이다.

한편 이게 강건너 자기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는 집주인의 자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파도는 서로의 영역을 서로 침투하며 확대 재생산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또 다른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개인의 불안은 신문지면에서 네이버 첫화면에서 사회의 불안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다시 개인의 불안으로 다시 커지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런 분열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18세기 이전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를 한 가지 삶의 기술이 더 필요하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아닌지, 나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 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현실의 파도에서 어떤 물살을 탈 것인지, 어느 지금과 어느 현재에 임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파도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는 서핑의 테크닉이, 삶의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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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착각

by Hahn on Jan.26, 2010, under Uncategorized

네이버에 키워드를 때려 넣는다. 검색 결과가 나온다. 구글에 키워드를 때려 넣는다. 검색 결과가 나온다. 네이버와 구글을 사용하면서 나는 한동안 검색엔진이라는 것이 전화번호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 네이버 검색결과에 나오는 실시간 인기검색어라거나 구글 자이트가이스트, 혹은 구글 인사이트 포 서치 같은 데에서 결과로 뜨는 검색어 통계를 보노라면 아 이건 저 옛날 소크라테스 플라톤적 오라클 신탁과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질문을 던지고 엔터를 누르니 점괘가 나오는 게 아닌가. 주역으로 점을 치면서 질문을 던지고 동전을 퉁기는 것과 질문을 입력하고 엔터를 누르는 것이 대체 뭐가 다를까.

우 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네이버와 구글에 점괘를 묻는다. 수억 수천의 질문과 수억 수천의 대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무선으로 떠돌아다닌다. 우리가 호흡하는 대기가 공기로 가득 차있듯 우리가 앉아있는 공간이 단어와 정보로 가득히 들어차있다. 수천만 명이 입력한 키워드가 1등부터 차례대로 통계로 집계되어 나온다. 등장한지 채 백 년도 안된 학술 용어 “집단무의식”이 이제는 일반명사처럼 쓰이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 확실히 21세기는 “시대정신”이 눈과 피부로 감지되는 시대다. 한 사람의 머리 속에 생각이 휘몰아 치듯, 4천만 한국인의 시대정신에도 검색어가 휘몰아 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마라”는 말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연애문제로 가슴을 앓고 있는 남동생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조언이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각기의 진리를 담고 있는 두 격언이 동시에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가 제각기 맞는 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나무를 찍어야 하는 걸까 말아야 하는 걸까? 어려운 처지가 아닐 수 없다. 나무를 포기하자니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음을 못 본 채 해야 하고, 나무를 찍자니 오르지 못할 나무는 보지도 말 것임을 무시해야 한다. 찍거나 말거나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찍는 것도 아니고 아닌 건 이 세상에 없다. 드렁큰 타이거 <뽕짝이야기>도 아닌데, 나무를 찍어도 안 찍어도 “한쪽이 성립되면 다른 쪽은 성립되지 않는 서로 모순된 두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는 딜레마라 부른다.

삶이란 사실 딜레마로 가득 차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삶이란 백사장에 펼쳐진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한 뭉텅이 크고 작은 딜레마와 선택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뜬다는 펀드에 숨겨둔 비상금을 묻을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따위 만이 선택인 것이 아니라, 버스 안에서 갑작스레 배탈이 났을 때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도 선택이고, 오늘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도 선택이고, 지금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도 선택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란 사실 “죽 늘어선 선택” 내지는 “∫선택”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선택이 아닌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무 앞에 선 세상 청춘들은 나무를 찍거나 찍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하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를 찍거나 찍지 않거나 둘중 하나를 하고 있거나, 혹은 나무를 찍거나 찍지 않거나 둘중 하나를 하는 것으로 “되고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연애문제를 상담해주는 네이버의 수많은 지식인들도 나름 나무를 찍었거나 찍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이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모두가 의도 했던 말건 간에 한쪽을 취하고 한쪽을 버렸다는 것, 혹은 한쪽을 취하고 한쪽을 버린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인데,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모두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게 사실은 “그냥 일종의 믿음”이 아니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억울함”이라는 단어가 탄생하는 지점이다.

우 리는 우리의 믿음에 명분을 대는 습관이 있다. 나무가 너머 갈 것으로 “보는” 데에도 명분이 있고 나무가 넘어가지 않을 것으로 “보는” 데에도 명분이 있다. 당연하다. 이유와 근거가 있으니까 믿는 것이다. 이유가 있으니까, 명분이 있으니까 말이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우스운 점은 실제 잘 들여다보면 뭐가 됐든 그 이유라는 것이 마치 어처구니 없는 맷돌처럼 애초에 토대란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얼토당토 않다. 무언가 한가지 확실한, 절대 불변의 무언가 뼈다귀 내지는 주춧돌이 있어야 논리가 되고 말이 될 것이 아닌가. 명분과 이유를 지탱해줄 저 가장 깊은 곳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어야 말이 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토대 없는 명분 위에 또 토대 없는 믿음이 쌓인다. 토대 없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토대 없는 세계관은 “Seeing is Believing”이라는 근대성의 미신을 토대로 또 다른 토대 없는 선입견을 쌓는다. 세상에 소문과 해석이 너무 많아졌다. 편견과 점괘가 너무 많아졌다. Seeing에서 비롯된 Believing이 너무 많아졌다. 거대한 착각이다. Humongous fungus among us, 우리안에 드리운 거대한 핵폭탄 버섯구름처럼.

내 말이 맞으면 네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네 말이 틀려야 내 말이 맞는 게 아니다. 내 말이 맞으니까 네 말도 맞는 거고, 내 말이 틀리니까 네 말도 틀린 거다. 황희정승은 말했다. “니도 맞고 내도 맞다”고. 결국은 토대가 없는 나의 일리를 맹신하기보다 한 발짝 물러서 상대방의 일리에 마음을 열어 두느냐 마느냐의 문제다. 개개인의 맘 저 밑바닥에 깔린 세상 전반에 신뢰에 대한 문제다. 보는 것이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게 보는 것임을 탁탁 털고 인정하느냐의 문제다. 마음을 여는 것에는 누가 먼저가 없다. 미국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있었듯 한국엔 황희가 있었다. 지금 천원 짜리에 새겨진 황희야 말로 우리가 진정 존경해 마지않아야 할 분이다. 우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미국에서 $100불 대접을 받는 것처럼 황희정승도 10만원권 수표에 새겨야 한다. 천원짜리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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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hology #1

by Hahn on Dec.16, 2009, under Uncategorized

내게도 도움이 되고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선택은 언제나 올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도움이 되고 남에게는 피해가 되거나,
남에게는 도움이 되는데 내게는 피해가 되는 것은 모두 원망을 낳습니다.
내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남에게도 도움 되지 않는 선택은 가장 나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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