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태블릿 산 기념으로 해본 낙서.
무언가 그려본지 너무 오래됐다.
“악이란 바로 힘의 행사입니다. 핵심은 결국 힘이죠. 다른 이의 마음을 다치게 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목숨을 앗아가거나, 혹은 사상을 파괴시키고, 인간성을 버리고 범죄를 저지르는거죠. 구글에서 “악”이라는 평범한 단어를 검색하면, 3분의 1초 만에 1억 3천 6백만개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체계 내에 존재하는 ‘힘’에 대해 알아야 하죠. 체계가 개인을 타락시키는 상황을 만드는 겁니다. 체계란 바로 법과 정치, 경제, 문화적 배경을 말하죠. 그것이 바로 나쁜 환경을 만드는 힘이라는 겁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이 외모를 바꾸는게 과연 차이가 있을까요? 익명성을 가진다는게 피해자를 다루는데 차이를 만들까요? 전쟁터에 나갈 때 외모를 바꾸지 않는 문화도 있지만, 한편으론 “파리대왕”처럼 분장하는 문화도 있습니다. 가면을 쓰기도 하고, 대부분은 유니폼을 통해 익명성을 얻지요.”
“악인을 비난하는 것만큼 쉬운게 없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 도스토옙스키
“상황이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상황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적대적인 상상력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악의 가해자가 된다든지,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웅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에서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무관심이란 악을 저지릅니다. 대개 어머니들은 “괜한 데 참견하지 말라”고 말하니까요. 이제는 말해야합니다. “엄마. 사람이 먼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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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not a pipe.
인간이 하는 말은 100% 다 구라고 뻥이다. 신의 명제를 인용할 수 없는 한 모든 인간은 구라쟁이다. 구라쟁이가 되고 싶지 않으면 말하길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 거짓말이란 사실 없다. 니가 치는 구라를 내가 믿으면 참말이고 내가 안 믿으면 뻥인 것이다. 이런 할 일 없는 뻘소리가 말이 되는지 안되는지도 듣는 사람에게 달려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대로 나고, 듣는 사람도 듣는 사람대로 나다. 나는 절대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
세상이란 늘 애꿎은 사람 데려다 잘난 인간 못난 인간으로 만들어 놓곤 한다. 나역시 졸지에 이런 인간이 되기도 또 저런 인간이 되기도 많이 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한가지 웃기는 것은 거기에 항상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것. 그 이유가 바로 진짜 뻥이다. 세상이 망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단 하나, ‘지나치게 이유가 많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이유가 너무 많은 시대다.
구라를 치자. 자신있게 치자.
Listen, Atula. This is not new,
It is an old saying -
“They blame you for being silent,
They blame you when you talk too much
And when you talk too little.”
Whatever you do, they blame you.새로운 말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 말을 들어라.
“사람들은 그대가 침묵해도 비난하고
그대가 말을 너무 많이 해도 비난한다.
그리고 너무 적게 해도 비난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네가 무엇을 하든 비난할 것이라네.The world always finds
A way to praise and a way to blame.
It always has and it always will.
세상은 늘 칭찬하거나 아니면 비방할 구실을 찾고 있고
이것은 늘 있어왔던 일이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일인 것을.
“시그마 2의 N승”
지난 금요일에는 서울문화포럼(scf21.org)에 TEDxSeoul의 오거나이저로서 초대를 받아 패널로서 자리에 섰습니다. 그날 많은 이야기들을 듣고, 또 배웠지만 문득 LETS 컨퍼런스를 기획하는 최승준님께서 했던 얘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군에서 복무하던 그 어느 날 문득 깨달으셨다고.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어야 했고, 아버지가 있기 위해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또 어머니 있기 위해서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있어야 했다구요. 그 위로도 쭉 마찬가지겠지요.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어머니…외할머니의 어머니와 또 그의 아버지. 나라는 한 사람이 있기 위해서 그 위에는 고등학교때 배웠던 수열이 기억이 안나 수식으로 표현을 못하겠지만, 여튼, 2+2^2+2^3+2^4+… 만큼의 사람들이 필요했다구요.
이런 사실을 떠올리노라면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란 앞서 간 수 없이 많은 삶과 경험의 시행착오의 결실이자 꼭대기이며 최전방이라는 것. 우리는 정말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것. 우리 모두의 삶은 각자의 삶을 앞서간 가진 시그마2^n 만큼의 삶과 죽음이 피워낸 꽃이자 열매라는 것. 수 없이 많은 피의 가닥을 타고 내려왔을 수많은 축복과 저주와 원인과 결과의 끝에 우리 개개인이 맞물려 있다는 것. 그 피를 타고 내려왔을 아주 조그마한 생각의 씨앗들이 지금 우리의 생각을 이루고, 또 그 생각이 우리 주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고 이 것들이 지금 우리를 지나 다음 세대로 이어지리라는 것. 계속해서 맞물리는 시작과 끝. 모든 방향으로 수 없이 교차하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우리 역시 지금 이순간 새로운 이야기의 한 부분을 써내려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 합니다.
Read More8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의 평균 기대 수명이 100이라고 한다. 한 가지 일만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20년 전 외할머니 환갑잔치를 할 때만 해도 이야, 환갑이면 어엿한(?) 할머니였는데, 벌써 우리 부모님이 환갑을 바라보고 계신다. 놀라운 것은 어머니, 아버지를 30분 동안 뚫어져라 쳐다봐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기척은 커녕, 그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밖에는 발견할 것이 없다는 사실.
부모님 세대는 은퇴를 하고 몇 십 년을 더 살면서 노후준비를 하셔야 하고, 우리는 그보다 더 오래 살고 그보다 더 오랫동안 노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30년 동안 공부하고 30년 동안 일하고 은퇴하면.. 그리고 그 뒤에도 살아야 할 날들이 20년 30년 이상 남아 있다면 삶에서 뭘 하고, 어떤 의미를 찾으며 살아있음을 느껴야 할까.. 소유의 의미가 변한다. 사랑의 의미가 변한다. 가족의 의미가 변한다. 우린 아무도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세대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열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변하고 있다. 모든 세대에게 모든 것이 처음인 시대…
모든 것이 재조정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이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것은 어쩌면 다 쓸 데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습득한 지식은 오히려 장애물이다. 배우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 새로이 배우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잊어야 한다.
Read More마음 속에 담겨있는 많은 소원과 바램들은 의외로 서로 상충되며 모순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다 이루어질 수 없다.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모든 다른 욕구와 욕망에 우선하는 단 하나의 욕망. 다른 모든 것 필요와 욕구를 압도하는 단 하나의 간절한 목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에 대하여 간절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간절함이 있다는 말은 무언가를 추구함에 있어 뒤따를 모든 원치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저항과 부작용과 결과들을 모두 감내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Purpose가 있는 사람들이다. 간절한 Purpose.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Read More언젠가 금강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서 삼상(三上)이라는 봤다가 그 내용이 하도 웃겨서 기억해 뒀다. 생각이 잘 떠오르는 세 가지 장소가 바로 말 위(馬上), 침대 위(寢上), 변소 위(厠上)라는 거다. 나 역시 오늘 공강 시간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문득 두 가지씩이나 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나. 그 깨달음이란 첫 째, 이 삼상의 법칙 일찍이 발견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시공을 초월한다는 점, 둘 째,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경험은 그 다른 어느 시대보다 기괴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다. 나는 이 사실을 공강시간 UCSD 캠퍼스의 어느 공중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깨달았다.
미 국 화장실에는 한국에는 없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세 가지를 들자면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는 접이식 테이블이 비치되어 있다는 점과, 소변기의 높낮이가 다 다르다는 점, 그리고 좌변기 칸마다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가 비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하려는 얘기는 이중 마지막의 시트커버 디스펜서와 관련한다.
나는 이 칸마다 배치된 1회용 시트커버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왜?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요도 없는 게 왜 이렇게나 가시는 화장실마다 많이도 있을까? 그건 아마 난 아니라도 이 사람들에겐 필요한 거니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고 저도 사람이다. 한 사람은 필요 없고 한 사람은 필요한 게 도대체 뭘까? 나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왜 필요한 걸까?
germ, 즉 세균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세균보다 훨씬 징글징글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TV를 두 시간만 보면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TV 광고의 삼분의 이는 넘어 보이는 약 선전, 비누 선전 속의 레퍼토리는 하나같이 다 똑같다. “현미경을 들이대니 어라, 세균이 많네! 그렇게 살지 말고 우리 약 먹어봐! 자 이제 깨끗하지?”다. 그래서 미국인은 제약 회사 혹은 비누회사의 광고를 통해 새로이 세균에 대한 공포를 주입받는다. “세균을 죽여 없애자!”라는 brainwash를 당한다. 나와 면접을 하던 다이애나 아줌마가 기침을 살짝 해놓고는 굳이 “germ”을 튀겨 미안하다는 해괴한 사과를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땅의 유치원생들이 초록색의 못생긴 세균을 그리고 그 밑에 “Germs are in the air, on your hands, on your feet, and they can get on the foods we eat!”라는 문구를 적은 포스터를 만들고 칭찬을 받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인은 확실히 한국인보다 세균이 무섭다. 미국인의 머리 속에 그려진 화장실의 중요한 한 부분이 1회용 종이 시트커버 디스펜서인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도 이 지점이다. 미국인은 세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악의 축이 두려운 것이다.

여 기에는 미디어 사회의 놀라운 매커니즘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에 의해 자신이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시트를 타고 세균이 스멀스멀 내 엉덩이를 타고 오르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무서운 체험이지만,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다.
나는 시트커버를 깔지 않고 좌변기에 앉아있는 내가 문득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놓았다. 언젠가 네이버 뉴스에서 ‘좌변기에 의외로 세균이 없다는 연구결과’에 대한 기사를 떠올랐기 때문이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깜짝 놀란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나조차도 판단을 네이버 1면에 유보해놓고 있는 게 아닌가! 세균이 두려운 것도, 세균이 두렵지 않은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다.
네 이버에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많은 “연구결과”가 우리의 눈을 현혹한다. 이게 좋다더라, 이게 나쁘다더라, 저게 좋다더라, 저게 나쁘다더라. 그러면 우리는 ‘이게 나쁘구나.. 저게 좋구나.. 이게 나쁘다잖냐, 저게 좋다잖냐’ 한다. ‘권위있는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라 하잖냐’ 한다. 같은 유전자 콩을 놓고 한쪽에서는 위험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지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안전하다는 연구결과가 쏟아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유전자 콩은 절대 안 먹는데 반하여, 또한 편 어떤 사람은 별 걱정 없이 잘만 먹는다. 이러나 저러나 ‘박사님의 말씀’이 머리에 들어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판단해 주신다.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E-편한세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 역사가 지향해온 바가 유토피아니까. 하지만 이렇게 점점 편해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을 느끼지 못하는 개구리처럼, 판단을 네이버에, 조선일보에, 또 시트콤 논스톱에 아웃소싱하는 경향 역시 점점 커지고 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겪지도 않은 일을 경험했노라고 착각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내 경험이 매체의 경험에 의해 잠식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 1994년 무렵이었던가. TV는 60년대 정도인 것으로 안다. 신문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였을 거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와, 신문을 보며 이명박을 욕하고, TV에서 무한도전을 보며 낄낄거리고, 싸이를 뒤지며 남 삶을 옅볼 수 있는 세계는 과연 어떻게 다를까? 활자매체의 전파에 힘입어 소위 미디어라는 것이 대중화 된 이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한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던 것을 의식한다. 네오와 미스터 앤더슨의 이중생활처럼 우리가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그 한쪽의 세계에는 평생을 함께 해온 가족과 오랜 친구가 있고, 매일같이 학교와 집을 이어주는 버스가 있으며, 서너 군데쯤의 자주 들르는 단골집이 있다. 그 반대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박지성이 국위를 선양하고,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오바마와 힐러리가 접전을 벌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부시가 한번도 본 적 없는 이명박을 만나고 있는 세계다. 일상이라는 물리적인 세계와 매체라는 붕 떠있는 간접의 세계가 서로 하나가 됐다가 둘로 분열이 됐다가 서로 확대 재생산 됐다가, 서로 완전히 관계 없는 것으로 되었다가 한다.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살지 않는 세계인지가 모호해진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생각인지가 모호해진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미디어를 통해 경험되는 중요해 “보이는” 것들에 의해 가리워진다. 신문도, TV도, 인터넷도, 라디오도 없던 1800년대를 살았던 사람의 삶은 지금보다 편하진 않았을지 몰라도 훨씬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 때의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여러 다양한 경계가 복잡하게 중첩되고 혼선되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세상이 힘들게 돌아가도 곰실슈퍼 아저씨와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주고받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하지 않았던가.
소고기, 부시, 이명박 대운하와 삼성 특검에 이르기까지 점점 미쳐 돌아가는 것으로만 보이는 네이버 속의 한국을 보면 경악하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다가 한편으로 이게 아냐, 내가 겪은 게 아니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곤 한다. 아귀다툼장인 것처럼만 보여서, 그래서 돌아가고 싶지 않은 한국도 사실은, ‘구체적으로 겪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에 오기 전의 삶을 떠올려 봐도 내가 실제로 겪는 구체적인 세계는 매체를 통해 접하는 세계와 중첩되는 부분보다 그렇지 않는 부분이 더 컸으니 말이다.
한편 이게 강건너 자기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는 집주인의 자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파도는 서로의 영역을 서로 침투하며 확대 재생산되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또 다른 파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개인의 불안은 신문지면에서 네이버 첫화면에서 사회의 불안으로 확대되고, 이것은 다시 개인의 불안으로 다시 커지기 때문이다.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런 분열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18세기 이전을 살았던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를 한 가지 삶의 기술이 더 필요하다.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아닌지, 나의 위치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 지, 서로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여러 현실의 파도에서 어떤 물살을 탈 것인지, 어느 지금과 어느 현재에 임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복잡한 파도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는 서핑의 테크닉이, 삶의 균형을 잡는 기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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